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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망상

여름은 늘 뜨겁다. 해가 머리 위에서 타오르고, 공기는 눅진하게 몸에 들러붙는다. 차가운 음료를 찾고 그늘 아래로 숨어도 열기는 좀처럼 떠나지 않는다. 그런 여름의 풍경 속에서 가끔 나는 몽롱한 망상에 빠지곤 한다. 땀이 흘러내리는 순간마다 현실이 흐릿해지고, 마치 다른 세상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다.

여름날의 망상은 늘 단순한 데서 시작된다. 한낮의 쨍쨍한 햇살 아래, 흔들리는 나뭇잎의 그림자를 바라보다 보면 마음속에서 낯선 상념이 고개를 든다. 갑자기 이 나뭇잎의 그늘이 끝없이 펼쳐진 숲길로 이어질 것 같기도 하고, 바람 한 점 없는 더위 속에서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모든 것을 휩쓸어 갈 것 같은 상상도 떠오른다.

여름에는 이상하게도 과거와 미래가 뒤섞인다. 어릴 적 여름방학의 기억이 유독 선명하게 떠오르기도 한다. 그 시절, 우리는 해가 질 때까지 흙먼지 속에서 뛰어놀았다. 땀이 줄줄 흘러도 지치지 않았고, 집으로 돌아와 수박 한 조각을 물고 있을 때의 시원함은 세상의 모든 행복을 다 가진 듯했다. 그런데 문득, 지금의 나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그 시절이 너무 멀어졌음을 실감한다. 뜨거운 태양 아래, 마치 두 개의 세상에 동시에 서 있는 듯한 기분.

여름은 또한 불안을 데려온다. 이맘때쯤이면 항상 묘한 초조함이 마음을 어지럽힌다. 아무리 해가 길어도 하루는 여전히 짧게 느껴지고, 끝없이 펼쳐질 것만 같던 계절은 사실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간다. 불안은 쉴 틈 없이 타오르는 태양처럼 끊임없이 나를 재촉한다. 더 많은 것을 해야 하고, 더 많은 것을 느껴야 한다고.

이러한 여름의 열기와 함께 피어나는 망상들은 때로는 달콤하고, 때로는 씁쓸하다. 너무 뜨겁게 타올라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허물어질 것만 같은 순간들. 그렇기에 여름은 늘 불완전하게 느껴진다. 너무 뜨겁고, 너무 찬란해서 쉽게 붙잡을 수 없는 계절.

하지만 나는 그 불완전함을 사랑한다. 여름의 망상 속에서 현실을 벗어나, 내가 원하는 어떤 세상이든 꿈꿀 수 있으니까. 내리쬐는 태양 아래, 나는 이 더위와 환상을 끌어안고 여름이라는 짧고 긴 계절을 살아간다.